대한민국에는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248㎞의 군사분계선(휴전선)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전쟁 혹은 6·25 사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6·25 동란이라고도 불리는 한국 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전쟁 인천상륙상전
한국전쟁(韓國戰爭)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입니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습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7월 15일부터였습니다. 이 날짜로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인천상륙작전 안을 상신하였으나 이를 위한 군사력의 분산과 인천이 지형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오히려 부산 교두보에 증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의 간만의 차가 9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하여 사용 가능하며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집결하기 때문에 인천 방어가 소홀하고 더구나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빨리 탈환하는 것은 군인과 민간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드디어는 9월 8일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는 드디어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다음 날에는 인천을 함락시켰습니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진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습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고 완전히 회복한 뒤인 9월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수도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선에 가깝게 계속 북상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6.25 전쟁 참전국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파병 16개 국, 의료지원 5개 국 등 총 21개 국이 6·25 전쟁에
참전했고 39개 국이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 60개 국이 지원했습니다.
전투 파병국
미국 - United States of America
영국 - United Kingdom
튀르키예 - Türkiye
오스트레일리아(호주) - Australia
캐나다 - Canada
뉴질랜드 - New Zealand
콜롬비아 - Colombia
네덜란드 - Netherlands
룩셈부르크 - Luxembourg
벨기에 - Belgium
프랑스 - France
에티오피아 - Ethiopia
그리스 - Greece
남아프리카공화국 - Republic of South Africa
필리핀 - Philippines
타이(태국) - Thailand
의료 지원국
인도(Republic of India)
이탈리아(Italy)
노르웨이(Norway)
덴마크(Denmark)
스웨덴(Sweden)
6.25 전쟁 주요 인물
이승만(李承晚)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또한 공산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38°선 이남에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단독 수립한 뒤 38°선 이북의 비합법정부와 공산진영 일체를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김일성(金日成)
1950년 6월 25일 04시 소련의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 설득해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과 UN군이 협력하여 반격하자 중국인민지원군 지원군과 소련군의 도움으로 1953년 7월 27일 22시 휴전을 하고 휴전선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이오시프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 한다’고 했음을 설명했습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마오쩌둥(毛泽东)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습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소련은 미국 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고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51년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그 해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950년 12월 그는 나토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유럽에서 나토군의 작전 사령이 주어졌습니다. 정계 입문에 아이젠하워는 1952년 5월 31일 군사 복무로부터 퇴역하고 1953년 한국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북한과 남한을 휴전 협정으로 가져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항복이 있은 후 일본에 주둔하다가 한국 전쟁을 지휘하였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군이 대구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인민군들을 남북으로 양분시켰습니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군 점령사령부 원수를 지냈습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3년이 넘는 전쟁기간을 거쳐 1952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것이 너무 슬프네요. 뼈아픈 역사의 날인 6월 25일을 맞이하여 참전용사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과 구독 눌러주시면 좋은 기운 받으실 거예요.
-출처
픽사베이
팩셀스
위키피디아
6월6일 현충일 유래와 대체공휴일, 그리고 태극기(조기, 반기) 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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